본문 바로가기

2.

손가락 달팽이 그림자

네 번째 구간의 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있어.

이 시간에 빛이 살짝 들어오는 걸 보니 해가 짧아지긴 했나봐. 상수역에서 지하철을 내린 승강장으로부터 지상의 빛을 보기까지 너는 항상 너만의 규칙이 있었잖아. 올라야 하는 곳을 구간으로 나누자면 총 네 군데인데, 너는 첫 번째 두 번째 구간을 계단으로 오르고 세 번째는 에스컬레이터를 타. 네 번째는 선택지가 없으니까 무조건 계단이야.

 

너는 에스컬레이터를 못미더워해서 계단을 더 좋아하지만 계속 계단을 오르면 아무래도 힘이 드니까, 에스컬레이터가 가장 짧은 세 번째 구간에만 에스컬레이터를 탔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탈 때 너는 긴장하곤 했어. 걔가 언제 어떻게 움직임을 멈춰버릴지 모르니까 불안하다고 했어. 그리고 디딤판이 적당한 높이로 올라왔을 때 그 위에 발을 디뎌야 하니까, 그리고 뒤에 오는 사람들의 속도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 발을 잘못 디디거나 살짝 미끄러지는 것과 같은 엇박자가 생기면 벌어질 상황이 두렵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긴장의 요소를 하나라도 줄여주고 싶어서 매번 너의 바로 뒤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탔어. 우리는 키가 비슷했기 때 문에 네가 나보다 한 칸 위에 올라있으면 딱 한 칸만큼의 차이가 났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너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이때만 볼 수 있는 다른 각도의 생경한 너를 계속 쳐다봤어. 처음 너의 상수역 규칙을 따라 했을 때는 숨이 찼는데 지금은 괜찮아. 혼자 있어도 너의 규칙을 따르게 돼. 언젠가부터는 나의 규칙이 됐어.

 

바깥에는 여러 색의 낙엽이 막 떨어져있어. 바람 타고 날고 굴러. 발에 차이는 낙엽과 함께 걷다가 우리가 자주 가던 중고서점 바로 앞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고 있어. 초록불의 남은 시간이 초로 표시되는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너는 항상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마음속으로 그것보다 3초 빨리 세면서 건넜잖아. 16초가 남았으면 13초부터 세는 거야. 너는 절대 뛰지 않아. 남은 초가 0으로 수렴해갈수록 보폭이 커지거나 걸음을 빨리하는 방법만 있을 뿐이지, 뛰지는 않아. 네가 세는 숫자가 0에 도달해도 실제로는 3초가 남았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도 너는 너의 시간대를 기준으로 0이 되기 전에 횡단보 도를 다 건너. 너의 이 규칙을 나도 알고 있어. 아는 척은 하지 않았지만, 너와 같이 건널 때면 나도 그걸 따르고 있었어.

 

지난주 월요일에 이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같이 건넜잖아. 흰 색 블록이 세 개 정도 남았을 때쯤이었어. 여기서 내가 멈춰선다면 어떨까. 너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민달팽이처럼 울고 싶다고 했어. 삼 년 전의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회색 돌 위를 기어가 는 민달팽이를 본 적이 있잖아. 지나간 흔적을 보고 눈물 자국이라고 했고, "쟤는 마냥 기어가면서 울고 있는 거야."


너는 너의 규칙들이 너에게 적용되는 일종의 에어백같은 거라고 유머처럼 말했어. 근데 그때는 그냥 멈추고 싶었나 봐. 에어백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싶었나 봐. 너는 느리고 조용하게 기어가는 듯이 울었어. 흔적을 남기면서 울었어.

 

버스 정류장에 이제 도착했어. 구급차가 소리를 내면서 내 옆을 지나갔어. 너는 구급차가 지날 때면 귀가 뚫릴 듯한 그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양 쪽 귀를 두 손바닥으로 막으면서도 저 차가 죽은 사람이나 죽을 사람을 싣고 가는지 혹은 죽은 사람이나 죽을 사람을 실으러 가는지에 대해 상상하고 잠깐 괴로워했어. 그런 괴로움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지나고 나서 일사불란하게 옆으로 비켜서는 자동차들 사이로 구급차가 달려가고 나면,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급차가 지난 자리에 자동차들이 원래대로 채워지는 게. 너는 그게 또 무서워서 괴롭다고 했어.

버스 맨 앞자리에 탔어. 지금의 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여서. 너는 가을 빛을 참 좋아했잖아. 언젠가부터 너의 말 끝에는 항상 차 조심해-라는 말이 따라붙었어. 올해 사주는 차를 조심해야 한다고. 나는 그래서 지금 버스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맸어.

 

너를 생각하고 있어. 떨어지는 해가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들의 왼쪽 편에 가을 냄새가 나는 황금빛을 마구 뿌리고 있어. 원래였다면 눈이 부셔서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그걸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열을 대강 맞춰 늘어선 자동차 수십 대의 보네트 위로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을 보며 속으로 1부터 5까지 센다. 내 눈에 꾹꾹 눌러 담아서 언젠가 너와 눈을 맞출 때 이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싶어서.

 

노란 빛이 버스 창문으로 들어와 그림자가 생겨. 손가락 그림자가 생겨. 검지와 중지만 펴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접는-보편적으로 '브이' 모양이라고 하는 걸 만들고 너는 손가락을 내 눈앞에 보여주면서 민달팽이라고 했는데. 그럼 내가 한 손으로 짱돌 같이 단단한 주먹을 쥐고 민달팽이 위에 얹었어. 단단한 집을 지어준다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세상에게 정했던 규칙들을 모두 다. 너는 흔적을 남기면서 울고 있어.